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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ets' travel to the Rabbit Hole
신보슬 (토탈미술관)
앨리스는 데이지 꽃다발을 만드는 게 좋겠다고 생각하고 데이지 꽃을 모으기 시작했다. 그 때, 갑자기 분홍 빛 눈을 한 하얀 토끼 한 마리가 뛰어왔다. 하나도 이상하지 않은 토끼였다. 앨리스는 심지어 토끼가 “아이쿠, 이런 너무 늦겠어!”라고 말하는 것을 듣고도 이상하다고 여기지 않았다....하지만 토끼가 조끼 주머니에서 회중시계를 꺼내보며 허둥지둥 거리자, 지금껏 조끼를 입고 회중시계를 본 적이 없었기에 호기심이 나서 토끼 뒤를 쫒기 시작하였다. 앨리스는 들판을 가로질러 토끼를 쫒아가다가 토끼가 풀 숲 굴속에 뛰어 들어가는 것을 보았다. 앨리스는 어떻게 다시 나올 수 있을지 생각할 겨를도 없이 굴속으로 뛰어들었다
그렇게 앨리스의 이상한 나라 여행은 시작되었다.
평범한 작업실이 늘어선 복도. 그 중 문 하나를 열면, 새로운 공간이 펼쳐진다. 어둑어둑한 조명에 익숙해질 즈음 벽면에 회랑처럼 늘어선 창문들과 마치 어서 그 안으로 들어오라는 듯 그 앞에 놓인 빨간 카펫과 샹드리에가 눈에 들어온다. 은은한 향초의 향기까지 더해져서 작가의 작업실이었던 그 곳은 어딘가 비현실적인 느낌의 공간으로 변한다. 그 낯선 창과 카펫, 샹드리에는 현실의 공간 안에 펼쳐진 또 다른 그 공간으로 관람객을 초대한다. 그 앞에 서면 전혀 다른 세상으로 빨려 들어갈 것만 같다. 그래서 일까, 애나 한의 작품 앞에 서면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첫 장면이 자꾸 떠오른다.
그리고 그렇게 애나 한이 만들어 놓은 공간 안으로의 우리의 여행도 시작한다.
애나 한 작품의 첫인상은 대단히 건조하고, 추상적이고, 미니멀하다. 그래서인지 그동안 그녀의 작업에 대한 많은 비평들은 주로 기하학적 추상이라던가 옵아트, 빛과 선, 면을 기반으로 한 공간 설치에 대한 부분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큐레이터 니나 호리사키 크리스탄스(Nina Horisaki-Christans)도 언급했듯이, 캔버스에서 흘러나온 생기 벽과 방을 가로지르면서 만들어내는 또 다른 공간감은 마치 관객으로 하여금 옵아트 ‘그 안’에 서 있는 듯한 착각을 일으키기도 하고, 실제(reality)와 환상(illusion) 그 사이 어디쯤에 있는 공간을 열어놓는 것처럼도 보인다. 이처럼 많은 사람들이 애나 한의 작업을 순수한 시각적 지각에 대한, 2차원과 3차원 공간 ‘그 자체’에 대한 이야기로 해석해 왔다. 때문에 그녀의 작업을 내러티브가 강한 동화와 연결시킨다거나, 그 안에서 어떤 이야기적인 요소를 끌어내는 것은 어쩌면 위험스러워 보일수도 있다. 하지만 전시나 프로젝트가 전개되었던 과정을 들어보면, 그녀의 작업은 상당히 내러티브에 기반으로 하고 있음을 발견하게 되고, 그로 인해 애나 한의 작업을 조금은 다르게 볼 수 있는 지점이 열린다.
애나 한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Transitive Relation: On Spot>의 서문에는 작가가 ‘오랜 외국 생활 후 돌아온 자국에서 미래에 대한 인생의 불안정과 작가로서의 정체성이 다시금 주목 받는 상황’을 보여주고자 했다고 쓰여 있다. 그러고 보니, 기울어진 사선이나 불안정해 보이는 칼라매칭을 통해서 묘하게 전해오는 어딘지 모를 불안감은 그녀의 작업이 단순히 형식적인 요소들의 실험에서 비롯된 것이 아님을 다시 한 번 확인시켜준다. 2011년 청주창작스튜디오에서 가졌던 개인전 <agent Orange> 역시 이러한 작업과정을 잘 드려낸다. 제목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이 전시의 주인공은 ‘오렌지 칼라’이다. 하필 왜 오렌지였을까. 전시가 있었던 2월은 한겨울 못지않은 매섭게 추운 달이다. 1월1일이 새해의 시작이라고는 하지만, 새로운 학기나 업무가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3월을 코앞에 둔 2월이야 말로 어쩌면 새로운 시작을 준비하는 때이기도 하다. 새로운 시작과 추운 겨울. 오렌지색에 대한 관심은 거기에서 시작되었다. 작가도 언급하고 있는 것처럼 오렌지색에는 많은 이야기들이 담겨져 있다. 자유와 힘, 창의력, 격려 등의 상징이기도 하며, 실제로 인간의 집중력을 강화시키고, 활동적인 색이다. 뿐만 아니라 칼라 테러피에서 증명되었듯이 오렌지색은 인간에게 적잖이 육체적 심리적으로 영향을 미치기도 한다. 새로운 시작, 얼어붙은 인간관계/사회적 관계의 회복과 치유 등의 메시지를 담기에 오렌지색은 적절한 테마였다. 전시장 바닥의 오렌지색 펠트나 그녀만의 선의 구성을 통해 만들어진 새로운 공간은 공간에 ‘대한’ 작업이면서 동시에 공간 안에 있는 사람 혹은 그 공간과 관련된 작가 이야기의 시각적 표출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애나 한의 작업은 이야기를 거둬 낸 무미건조한 조형요소들의 실험이 아니라, 그 안에 있는 이야기들을 추상적으로 압축하고 걸러낸 이야기에 가깝다. 그래서 그것은 ‘공간’(Space)에 대한 것이라기보다, ‘장소’(place)에 대한 이야기에 가깝다. 비록 작품이 담지하고 있는 내러티브가 설명적이지는 않을지라도, 애나 한의 작업은 공간 안에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담고 있는 ‘장소 특정적’(site-specific)인 작품임에 분명하다.
설치된 결과물로만 본다면, (<agent Orange>의 경우 오렌지 색조의 전시장 안에서 많은 관객들이 실질적인 위안이나 포근함 등을 느꼈을지 모르겠지만) 작품 이면의 이야기들은 잘 읽히지 않는다. 때문에 관객의 시선은 반복되는 스트라이프 라인이나, 칼라, 연극적인 붉은 커튼 등과 같은 표면에만 머무르다 떠나기가 쉽다. 만일 그것이 전부였더라면, 애나 한의 작업은 이전 많은 공간 설치작업들과 크게 다르지 않았을 것이고, 지금처럼 흥미롭지 않았을 것이다. 우리는 이미 색과 면, 선으로 작업한 많은 작가들을 보아왔기 때문이다. 하지만, 앞서 언급했듯이, 한 발 더 안으로 들어가 귀 기울일 수 있는 이야기적 장치가 있다는 것이 그녀의 작업을 좀 더 도드라지게 한다. 그리고 그것이 작품을 보게 하는 일종의 반전효과를 만들어낸다. 그저 작은 토끼 굴로만 알았는데, 그 안에 엄청난 세상이 있었던 것처럼, 미니멀한 설치작업으로만 볼 뻔한 작업들이 사실은 많은 이야기들을 함축적으로 (그리고 추상적으로) 담고 있다는 것은 흥미로운 반전인 것이다. 물론 이 이야기적 장치를 어떻게 관객에게 보여줄 것인가, 그 장치가 시각적인 것이 될 것인지 문자를 통한 설명이 될 것인지에 대한 것은 작가가 풀어야 할 과제이다. 지나치게 노골적으로 이야기하면 작품에 대한 흥미를 잃을 수 있고, 너무 모호하게 한다면 관객들의 시선과 마음을 표면에서 그 이상으로 이끌어갈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또 하나의 흥미로운 요소는 애나 한의 작업에서 반복적으로 나오는 점, 선, 경사도와 같은 추상적인 요소들이 지도에서 나왔다는 점이다. 작품을 통해 새롭게 보여지는 이러한 요소들이 지도에서 나온 것이라고 한눈에 알아차리기는 역시 어렵지만, 그것이 지도에서 출발했음은 꽤나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작품 속에 내재해 있는 이러한 추상적 요소들이 비록 명시적이지는 않더라도, 지도라는 것이 길을 안내하듯이 작품과 작품, 공간의 이야기와 작가의 이야기를 연결시켜주면서 안내해주는 잠재적인 길잡이의 역할을 한다. 이렇듯 애나 한은 작품이라는 새롭고도 낯선 공간을 마주하는 관객들에게 작가는 친절하게도 길잡이 지표들을 준비해 놓았다. 비록 그 지표 역시 다소 모호하여 쉽게 인지되지 않는다고 하더라고, 하나 둘 씩 작품마다 숨겨져 있는 지표들을 찾아가다 보면 어느덧 작품이 만들어 놓은 공간에, 그리고 그 공간 안에 숨겨진 새로운 세상과 이야기를 만나게 된다.
애나 한의 작업을 한마디로 요약한다면, 반전을 통해 낯선 세계로의 여행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가장 기본적인 시각적 요소들이라 할 수 있는 점, 선, 면 그리고 색을 가지고 그녀가 만들어내는 공간의 이야기를 단박에 알아차리기란 쉽지 않지만, 설치와 평면 그 사이에 있을법한 그 어떤 공간 안으로 빨려 들어가게 하는 힘이 있다. 마치 어떻게 빠져나올 수 있을 것인지를 고민할 사이도 없이 토끼굴 속으로 여행을 떠났던 앨리스처럼, 애나 한이 만들어 낸 공간 안에서 우리는 크고 작은 이야기들을 만나게 된다. 실제도 허상도 아닌 공간. 작가가 만들어 낸 (어쩌면 열어 보인) 공간 안에서의 우리들의 이상한 나라 여행은 계속될 것 만 같다. 그리고 왠지 작품들 사이의 연관이나 작품 사이에 숨겨진 단서들을 찾아 작품 속으로 떠나는 여행은 좀처럼 지루할 것 같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