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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월하는 공간 서사 (Timeless Spatial Narrative)
박수지
1. 공간 열림
빛이 공간에 드리우는 음영은 공간의 공백을 각인시킨다. 어떠한 빛도 하나의 공간 안에 균일한 빛을 줄 수 없다는 점이 공간의 공간성을 증거한다. 캔버스의 면이라는 이차원의 넓이와 전시가 발생하는 입체 공간의 부피를 오가는 애나한의 여정은 공간성의 최소단위를 떠올리게 한다. 그 여정은 현실의 공간 혹은 공간의 이미지에서 출발하지 않는다. 요컨대 대상을 재현하지 않는 애나한의 공간에는 인과 관계가 없다.
오래전부터 애나한에게 있어 이차원은 언제나 삼차원으로의 이행을 담보해 왔다. 캔버스의 텅 빈 면은 무한한 경우의 수의 공간을 포함하게 될 무궁한 공간이었다. 이때 그러데이션은 공간을 창출하는 데에 있어 가장 충실한 동반자다. 공간 안에서 광원으로부터 멀어질 수 있다는 점은 거리감을 제시한다. 거리감은 다시 ‘시간적 공간(spatia temporum)¹’을 지속시킨다. 이처럼 이차원의 평면에서 그러데이션은 시간적 공간을 군더더기 없이 소화한다.
작가는 ‘색이 빛을 흉내 낸다(mimic)’고 말한다. 그러나 색은 단순히 빛을 모방하지 않고 빛의 속성을 제안한다. 균일하지 않게 공간을 점유하는 빛은 애나한의 회화에 고스란히 조형화된다. 한 점의 회화 안에서 색으로부터 빛을 체감하는 동안 공간이 열린다. 이때 열린 공간은 틈과 공백으로 이루어져 있다. 틈과 공백은 마름모꼴, 아치형과 같은 반복되는 형태 안에서 맥락화 한다.
캔버스 안에서 마름모꼴은 언제나 다른 위치에서 다른 넓이와 길이로 열린다. 마름모꼴의 형태는 벽을 의태 한다. 벽은 공간을 구획하는 동시에 공간의 존재를 알게 한다. 마름모꼴은 그러데이션과 만나 공간의 깊이와 크기를 결정한다. 그러데이션의 방향에 따라 빛의 경로가 바뀌며 마름모꼴의 입구와 출구가 달라진다. 반면 아치는 어느 곳에서나 문(portal)이 된다. 아치는 창문이고, 벽과 벽 사이를 드나드는 문이며, 회랑의 기둥을 지지하는 샛문이다.
형태와 색의 결합으로 면에 관한 인식이 천천히 확장될 때 이차원에 두드러진 삼차원의 공간이 비로소 감지되기 시작한다. 때때로 애나한은 직접적인 빛을 회화와 함께 사용한다. 빛 반사가 있는 소재나 거울 또한 그의 회화가 추구하는 공간 창출과 비슷한 맥락으로 공간을 만들어 낸다는 점에서 애나한의 관심 안에 있다. 공간을 해석하고 재창출 하는 만큼 애나한의 작업은 전시 공간의 건축적 배경과 민감하게 조응한다. 이때의 조응 방식은 작가의 발견이나 해석으로 공간을 점유하기보다, 공간 자신조차 미처 알아채지 못했던 장소를 작가가 발견해 가며 열어 보이는 방식에 가깝다.
2. 통제, 균형, 자유
애나한은 촘촘하게 계획한다. 모니터를 통해 ‘한눈에’ 확인할 수 있는 그러데이션을 미리 구상한다. 일러스트에서 명도, 채도를 바꿔가며 완성한 색의 구성과 틈의 배치는 작가가 판단한 균형감을 따른다. 이때의 균형감이란 직관과 다르지 않다. 원하는 색이 나올 때까지 조색을 수없이 해가며 비교하고, 여럿의 조명에 비추어 보며 최종적인 색을 결정한다. 물감이라는 통제 불능의 물질은 순순히 작가의 인식을 밀도 있게 따라간다.
일러스트로 만들어 낸 결과물은 오차를 되도록 허용하지 않은 채로 캔버스에 옮겨간다. 그러나 모니터와 달리 캔버스에 올라간 아크릴 물감은 이내 스미고 마른다. 마른다는 뜻은 색의 경계가 생긴다는 뜻이다. 두께에 미세한 차이가 생긴다는 뜻이다. 결국 작가의 수행이 작가의 구상과 같아지도록 만들기 위해 어떠한 수준 이상의 신체적 노력이 요청된다. 그 노력은 인식과 수행 사이에서 고도의 집중을 수반한다.
이는 때때로 붓질의 횟수에 관한 일이 되기도 한다. 중첩은 애나한의 주된 메시지가 아니지만 그가 만족할 만한 그러데이션을 이끌어내기 위한 중첩의 과정은 필수적이다. 중첩의 횟수와 그러데이션의 완성도가 언제나 비례하는 것은 아니다. 아주 가끔은 강력한 통제 사이에 깃드는 우연에서 이르게 찾아온 균형을 발견하기도 한다. 그러나 균형은 애초에 구상 단계에서 이미 충분히 고려되었고, 철저히 예비되었으므로, 애나한에게 있어 최상의 만족은 오차 없는 구현이다.
작가가 다루는 물리적 공간의 규모와 작가의 신체가 감당할 수 있는 수행 범위 또한 애나한의 작업을 가늠하는 데에 중요한 요소가 된다. 한번에 인지 가능한 크기라던가, 뻗어 나간 작가의 팔이 한 붓으로 스트로크를 만들어낼 수 있는 거리는 작품의 형식이자 내용과 긴밀하게 연결된다. 규모와 범위가 궁극적으로 작품의 시각적 표면의 기이한 완성도를 좌우한다는 점에서, 이러한 표면이 보는 자의 공간에 관한 인지를 다르게 제안한다는 점에서, 완벽에 가까운 통제만이 작품이 가질 자유를 보장한다.
애나한의 통제는 한편으로는 작가가 가진 사고 공간의 자유로부터 출발한다. 작가가 구현하는 공간의 범주는 이차원 안에 드러나는 삼차원이기도 하지만, 삼차원 안에 개입하는 삼차원이기도 하다. 이때 작가의 사고 공간은 차원을 벗어난다. 이는 작가의 직관이라는 흥미로운 추상의 과정이다. 예컨대 어린왕자가 열망하던 ‘양이 들어있는 상자’가 눈에 안 보이는 공백이자, 기대이자, 비밀일 때, 양이 든 상자라는 공간에 관한 애나한의 직관은 으레 이차원, 삼차원으로 구분되는 영역을 자연스럽게 초월한다. 통제는 직관을 거쳐 신체적 감각을 제공하는 물질로서 다시 환원되고, 자유만 남는다.
3. 고유 서사
공간은 끝내 시간을 발생시키며, 시간은 서사를 끌어당긴다는 점에서 어쩌면 애나한의 작업은 필연적으로 서사성을 내포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다만 그 서사가 인물, 배경, 관계, 갈등 등의 개연성을 가진 이야기의 서술이 아닐 뿐이다. 애나한은 전시 <Mr. Conjunction is Waiting>에서 접속사를 통해 작업에 서사의 가능성을 배태하는 시도를 펼쳤다. 접속사는 명백한 언어이되 서술의 본격적인 의미를 지시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서술 사이의 행간에 가까운 말로써 이를테면 언어로 된 공간이다. 더 정확하게는 행간의 분위기이자 의미의 그러데이션이다.
시간은 언어를 거부할 수 없다. 시간이 흐르는 동안 언어는 의지와 관련 없이 튀어 오른다. 그런 점에서 모든 시간은 서사와 동행한다. 애나한의 작품을 들여다보는 관객은 작품과 자신의 간격을 조율한다. 응시의 과정에 수반되는 시간을 통해 그림으로부터 서사의 경험을 자연스럽게 획득한다. 그 서사는 하나의 작품을 응시하는 동안 이루어지기도 하지만 작품이 창출한 공간 사이를 오가는 동안 경험되기도 한다. 그때의 서사란 언어로 표현되기에는 끝내 불충분한 것으로써 포괄적인 느낌이나 감정에 가깝다.
애나한이 설계한 공간으로 들어선 관객에게 빛이 퍼질 때 보는 자는 서사의 관찰자에서 서사의 일부로 전환된다. 빛이 퍼지는 감각은 회화에서도 설치 작품에서도 같은 방식으로 작동한다. 이때 작품으로부터 펼쳐진 심상적, 물리적 공간에서 그저 시간을 보내는 것이야말로 의미를 지각하는 가장 꾸밈없는 방법일 수 있다. 외부로부터 주어진 의미의 틈입을 거부하고 자신만의 시간을 공간에 지속시키는 상태는 아무도 빼앗을 수 없을 만큼 고유하다.
그런 점에서 어쩌면 다수의 좋은 예술 작품은 그 제목이 ‘무제’이거나 하나 이상의 제목을 지니는 것이 가장 합당할지도 모른다. 예술로써 추구하는 궁극적인 자유에 있어, 때로는 작가 또한 자기 작품을 완전하게 안다고 자부할 수 없다. 이는 작품을 창작할 때 완벽에 가까운 통제를 실천하는 것과는 별개의 일이다. 만일 작품의 목적, 이유, 서사 등에 모두 정확한 답이 있다면 예술의 가장 큰 공백이자 흥미로운 비밀은 사라진다. 그런 면에서 예술 작품은 보는 자의 자기만의 독해를 포함한다. 이때의 보는 자는 창작자도 포함된다. 애나한의 작품은 언제나 하나 이상의 해석을 포용할 준비가 되어있다.
애나한은 삶, 생각, 평면, 입체라는 다공의 층위에서 지속적으로 공간을 갈구한다. 공간이라는 무궁한 개념은 그에게 예술의 물질로 탐구할 만한 주제를 끝없이 던진다. 그가 탐구해 온 공간은 공간 그 자체를 창출한다는 점에서 독립적이다. 그의 예술은 예술 외부에 자신의 질문을 의탁하지 않는다. 그가 만들어낸 공간에서 시간을 지속시키는 경험이 경험하는 모두에게 자신만의 방식으로 즉각적이며, 특유하고, 근원적일 수밖에 없는 이유다.
1 폴 리쾨르,『시간과 이야기 1』, 1장「시간 경험의 아포리아」, 김한식, 이경래 옮김, 문학과지성사, 1999.